위트니스 리를 인용함

오이코노미아(oikonomia)

신약에서 경륜(economy)이란 단어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의 영어 화된 형태로서 강조하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단어는 교회를 산출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계시하는 장인 에베소서 3장에 사용되고 있다. 9절은 “비밀의 경륜”을 말한다.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와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nomos) 두 단어의 합성이다. 그러므로 오이코노미아란 가정의 법, 집안 행정이다. 어떤 번역본들은 오이코노미아를 “행정”으로 번역하며 또 다른 번역본들은 “배열” 또는 “계획”으로 번역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의 계획, 그분의 행정, 그분의 배열이다.

(위트니스 리, 옛 창조에서의 사탄적인 혼란과 새 창조를 위한 신성한 경륜, p.13)

이 메세지의 전체 제목은 “하나님의 경륜과 그분의 분배하심”이다. “경륜”과 “분배”라는 용어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고, 심지어 특이한 용어이다. 신약의 계시에 따르면 “경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계시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특별한 용어이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로서 ”“오이코스(oikos)"와 ”노모스(nomos)"로 이루어져 있다. “오이코스(oikos)"라는 단어는 집, 가족 가정을 의미하고, ”노모스(nomos)"라는 단어는 법을 의미한다. 가정의 행정 내에는 몇 가지 계획과 안배가 있으며, 가족 구성원에게 가정의 풍성을 분배하기 위한 기술 중 몇 가지를 실행함이 있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분배하심, p.95)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자신을 그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기 위한 그분의 가정행정으로서 그분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인 그분을 표현할 집, 가정을 갖기 위한 것이다(딤전3:15). 경륜이란 단어의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에베소서에서 세번 사용되었다. 1장 10절과 3장 9절에서는 “경륜(dispensation)"이라 번역되었었고 3장 2절에서는 ”청지기직분 (stewardship)"이라고 번역되었다. 하나님이 경륜은 그분의 안배로서 그분의 계획과 목적 그분의 가정 행정이다. 에베소서 3장 2절에서는 바울에게 주어진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울은 하나님의 청지기였고 하나님은 그에게 청지기 직분이라 불리는 사역과 봉사를 주셨다. 하나님 편에서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안배와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바울의 편에서는 오이코노미아가 바울의 청지기직분과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봉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안배는 결국에는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청지기직분이 되었다. 디모데 전서 1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이들을 가리켜 다른 것들을 가르치지 말고 하나님의 경륜을 가르치라고 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안배와 계획을 가르치라는 말이다.

경륜(dispensation)과 분배(dispensing)는 두 가지 다른 것이다. 분배는 주고 나누고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경륜이 있는데 그분의 분배는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분배로 그분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신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으로부터 나온 계획과 안배이다. 하나님의 분배는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에 따른 분배와 나누어줌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7-8)

신성한 삼일성의 경륜은 사도들의 하나님의 은혜의 직분이 되었다. 에베소서 3장 2절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직분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이곳의 “직분”이라는 말과 1장 10절에 있는 “경륜”에 대한 단어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첫째로 하나님의 분배,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그 다음에 이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직분이 되었다. 경륜과 직분은 사실상 하나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하고 계시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과 꼭 같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직분이다. 그러한 직분은 그분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은혜로서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직분으로부터 사도들의 사역이 나오며 이 사역은 하나님의 경륜과 부합한다. 우리가 가진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기 위하여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분배하심과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직분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이다. 신약에 계시된 사역은 유일하다. 하나님은 두 경륜이나 두 직분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신성한 경륜과 하나의 신성한 직분을 가지고 계신다. 이 직분으로부터,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 안으로 하나님이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한 하나의 유일한 사도들의 사역이 비롯되는데, 이러한 사역은 그분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표현하기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유기적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p.30-31)

하나님의 경륜

신성한 경륜은 하나님의 가정 행정의 영원한 계획의 안배이다(엡1:9-10, 3:9-11, 딤전1:3-4). 신성한 경륜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로서 영원부터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던 비밀이다. 이것은 지난 세기에 어느 사람에게도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었다. 아담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고 그러므로 감추인 비밀이었다. 사람들은 창조를 볼 수 있었지만 창조의 목적은 이해하지 못했었다. 오늘날 이 비밀은 우리에게 밝혀졌다...

신성한 경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만드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인데(엡3:11) 그것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1:10).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만물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된 것을 보지 못하지만 작은 범위 내에서는 이 통일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의 계획은 나누는 것이다. 이유에 상관없이 어떠한 분열이던 반드시 정죄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분열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는 것에 대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위한 그분의 충만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갈망하신다(엡1:23, 3:19b). 이것은 단지 몇몇의 믿는이들로 구성된 모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사람의 유기적인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몸을 갖기 위하여 그분은 반드시 그분 자신을 그분이 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셔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11-12 )

신성한 삼일성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분이시지만(신6:4, 고전8:6)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기도 하다(마28:19b).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조화시키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이 것은 성경에 있는 계시이다. 이 두 방면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아마 혼돈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또한 세 분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시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분은 구별되나 나뉘지는 않는다. 그들은 구별되는 셋이나 또한 한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서로 공존하시고(마3:16-17, 엡3:14-17) 상호내재하신다. 공존한다는 것은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부의 공존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이 어떻게 상호내제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상호내재하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이 서로서로 존재하고 서로 안에서 거하는 것이다(요14:10-11, 17:21). 영원과거로부터의 신성한 삼일성의 세분은 서로서로 공존해오고 상호내재해오셨다.

어느날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인 아들이 성육신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요8:29, 16:28a, 32b, 10:25). 그분이 아버지와 함께 오심은 그 영으로 말미암았다(마1:20, 눅1:35, 4:1). 이것은 성육신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의 공존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아들이 말하길 그분은 아버지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고 그가 하신 말씀은 그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했다(10, 24절). 이 장은 또한 실제의 영이 아버지와 함께 아들로서 오심을 계시한다(16-20, 23, 26절).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내제를 나타낸다. 아들은 아버지안에서 살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산다. 아들의 말씀은 아버지의 역사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상호내제를 계시하는 또 다른 말씀은 이사야서 9장 6절이다. 이 구절에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 태어난 아이는 또한 우리에게 주신 아들로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한다. 독생자인(요3:16) 그 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우리에게 주신 아들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비록 우리는 온전히 말씀의 이 구절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세분은 구별되는 세분이나 한분이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구분되고 아들은 그 영으로부터 구분되고 그 영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구분된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이고(사9:6, 요14:9-10) 아들은 또한 그 영이다(고후3:17). 아들은 육신이 되고(요1:1, 14) 마지막 아담이라 불리웠다. 이 마지막 아담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고전15:45b)이 되었다. 우리에게 주신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웠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그 영 둘 다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31-132)

분배

“분배함”이라는 단어는 나누어준다는 의미이다. 애찬할때 풍성한 음식이 있지만 모든 이들에게 음식을 분배해 줄 몇몇 “분배자”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음식의 분배이다. 더 나아가 우리 안에 들어온 음식은 그것 자체를 우리 안으로 분배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음식을 소화하는 것은 음식의 분배에 동역하는 것이다. 소화한 후에는 소화하여 받아들인 것을 흡수하는 동화의 과정의 있다. 이것은 음식의 분배에 한층 더 동역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음식은 우리 안에 있게 될 것이고 우리가 먹은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것이 “분배함”이라는 단어의 의미이자 함축하고 있는 뜻이다.

특별히 신약 시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은 분배하심의 문제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영원 과거에 계획했던 그분의 경륜, 즉 그분의 가정 경영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의 경륜, 즉 그분의 가정 경영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신성한 삼일성-아버지, 아들, 영-안에 계신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신약에는 많은 것들이 다루어져 있지만 우리가 신성한 계시인 신약의 깊이 안으로 들어간다면 하나님이 참으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경륜, 즉 가정 경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볼 것이다. 이 경륜은 바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운행하심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오늘날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이 하나의 일 안에서, 하나의 일을 위해 운행하고 계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모든 선민들 안에 분배하시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신약에서 하나님에 관해 언급된 모든 것은 그분의 경륜을 위한 분배하심과 관계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알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세 가지 것이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이 주셨고 여전히 주고 계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세 요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심은 일종의 분배하심이다.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여러분 각자에게 이 돈의 얼마를 준다고 하자. 내가 주는 것은 분배함이다. 나는 분배하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돈을 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을 분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분배하시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분의 독생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분배되신다. 내 호주머니에 일 달러 짜리 지폐를 넣은 후에 나는 그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 영 안에 살아 있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 이 인격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그를 결코 멀리 버릴 수 없고, 쫓아낼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종이 한 장이나 설탕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기뻐하며 강한 이유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분배하심, 영문판 p.95-97)

신성한 경륜의 성취는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신성하시고 또한 삼일이시다. 그분은 그분자신을 우리에게 분배하시기 위한 과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삼일이시다. 그분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세 단계를 취하셨는데 그 단계들은 아버지의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이고 아들의 구속하심이고 그 영의 인치심이다. 이 세 단계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를 위한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의 첫 단계는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이다(엡1:4-5). 아버지는 창세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어떻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거룩해 질 수 있는가? 우리는 바깥의 행동으로 거룩해 질 수 없다. 또한 씻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 질 수도 없다. 씻음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지만 깨끗한 것이 거룩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는 거룩한 요소로 말미암음이다. 의사들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많은 광물질을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있다. 만약 우리의 피에 철분이 부족하다면 철분이 우리의 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을 그분의 거룩한 본성과 함께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거룩해진다. 그러면 그분의 거룩한 요소는 우리의 요소가 된다.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분의 선민인 우리가 아버지의 거룩한 본성을 갖고 아버지의 거룩한 본성이 그분의 선민인 우리 안으로 분배됨을 통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의 예정하심은 예정된 자들이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으로 분배됨을 통해 그들의 아들의 명분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갖는 것이다(엡1:5). 아들의 명분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산출한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갖는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거룩한 본성으로서와 우리를 그분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신성한 생명으로서 그분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나우어 주셔서 우리가 아들의 명분을 갖게 하신다. 거룩해지고 아들의 명분을 받는 것은 신성한 분배를 받는 문제이다. 우리가 거룩해 지고 아들의 명분을 받는 신성한 길은 하나님이 그분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에 의한 신성한 경륜의 성취는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을 통하여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아들의 구속을 통하여서이다(엡1:7). 아들의 구속은 단지 바깥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피흘리신 문제가 아니다. 아들의 구속은 이것보다 더 깊다. 아들의 구속을 통해 구속된자들이 그리스도안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분배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거 같다, “나는 너를 구속해 그리스도안으로 넣었다. 이 그리스도는 나의 기업이 되기 위해 너희의 요소가 될것이다. 나는 너희의 천연적인 존재 안에서 너희를 기업으로 삼을 의도가 전혀 없다. 너희는 죄인이다. 비록 너희가 구속받았지만 너희는 단지 깨끗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너희 안에 내 아들을 기업으로 삼기 위함이다. 지금 너희는 너희 안에 내 아들을 요소로 갖고 있어 너희를 무언가 귀한 것으로 조성케 한다. 이것은 내 기업으로 계수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은 그분자신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하셔야 했다.

에베소서 1장은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과 아들의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을 계시한다(13절). 그 영의 인치심은 마치 종이 위에 잉크가 눌려지는 인과 같다. 잉크가 더 적용될수록 종이는 더욱 잉크로 적셔지고 침투된다. 결국에 종이 전체가 인의 형상 안에 잉크의 본체로 인쳐지고 적셔지고 침투된다. 같은 방법으로 그 영은 우리 안으로 적셔지고 침투된다. 영어 찬송 501장의 마지막 절은 말하길:

그 영은 나를 적시고
하나님은 각 부분을 침투하시네

이 인치심과 침투와 적셔짐은 믿는이들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여러분이 이 장을 읽을 때에도 그 영은 여러분을 적시고 있다. 인치시는 잉크로서의 그 영은 영원히 젖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 영의 인치심은 인치심 받은 자들을 그들의 몸의 구속의 날까지(엡4:30) 아니면 그 날을 위하여 인치시는 잉크의 분배를 통해 적시신다. 우리 몸의 구속은 우리 몸의 변형이다(빌3:21). 우리 몸의 변형까지 그 영의 인치심은 계속해서 우리의 온 존재를 적시시고 침투하실 것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p.12-14)

에베소서 1장에 따르면 교회는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통해 존재가 조성되어 왔다고 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는 아버지가 근원이시고(3-6절) 아들이 과정이시고(7-12절) 그 영이 흐름이시다(13-14절).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의 분배는 아버지의 선택(4절)과 예정(5절)을 포함한다. 우리를 선택하신 아버지의 의도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예정은 우리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는 것이다.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서 그분의 아들들이 되어 아들의 명분을 누리는 것이다.

교회역시 아들의 구속을 통하여 조성되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셨다. 그 후에 아들은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아들의 구속은 우리가 아버지의 기업이 될 수 있는 상태로 이끌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오직 신성한 본성이 있는 것을 기업으로 삼으신다. 그분의 기업은 반드시 그분의 신성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구속은 반드시 우리를 하나님 자신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분의 구속은 단지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는 더욱이 우리를 하나님 자신 안으로 그분의 바로 그 신성한 요소 안으로 구속하는 문제이다. 이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기업을 위한 귀한 보배 안으로 우리를 조성시킨다.

에베소서 1장에 따른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는 그 영의 인치심 안에서 완결된다(13-14절). 완전한 삼일 하나님의 온 존재는 그 영의 인치심을 통하여 우리 존재에게 도달하신다. 그 영의 인치심은 인치심 받은 자들을 적신다. 살아있는 인으로서의 그 영은 또한 인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내적 존재에 적용된 인치시는 잉크이기도 하다. 종이 위에 찍혀진 인은 결국에는 마르지만 인의 잉크로서의 그 영은 영원까지 “젖어”있을 것입니다. 인치시는 잉크로서의 그 영이 “젖어”있기 때문에 그 영은 계속해서 우리의 온 존재-영, 혼, 몸-가 인쳐질때까지 적시고 침투하십니다. 결국에 신성한 인치심을 통하여 우리 사람들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표현뿐만 아니라 거듭나고 거룩하게 되고 변화 받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표현, 그분의 충만이 됩니다. 이것은 신성한 경륜, 그분의 영원한 계획으로서의 하나님의 영원한 안배의 뜻과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선민이 단체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표현과 충만이 되길 갈망하십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17-18)

신성한 분배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분-아버지, 아들, 그 영-으로 부터 나온다. 우리 안에 자리를 차지하는 신성한 분배는 삼일하나님의 집합과 총체와 완결로서의 만유를 포함하시고 생명 주는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의 움직임이다. 그 영을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 우리에게 기름 부으시며 우리에게 물을 주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를 만족케 하시며 우리를 강건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적시시고 우리를 침투하신다. 물 주시고 먹이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적시시고 기름 부으시는 것같이 앞에 언급한 모든 항목들은 분배의 문제이다. 매일 우리는 우리 안에 신성한 분배를 받음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7)

이 장에서 내 주제는 신성한 분배와 믿는이들과 삼일하나님의 연결과 연합이다. 신성한 분배는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그들의 생명으로 모든 믿는이들 안으로 분배하심을 나타낸다.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비밀이다. 나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분은 또한 당신 안에도 있으시다.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 모두 안에 동시에 계신다. 더욱이 이러한 신성한 분배와 함께 삼일하나님과 그분의 믿는이들의 연결과 연합이 있다. 연결은 외적인 반면 연합은 내적인 것이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우리는 옷과 연결된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음식과 연합된다. 한 면으로 우리 믿는이들은 우리를 덮는 우리의 의로운 옷으로 그리스도를 입는다(갈3:27). 믿고 그분 안으로 침례 받음으로 우리는 그분과 연결된다. 다른 한 면으로 그분은 우리가 마시는 우리의 생수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먹는 우리를 위한 영적 음식이다.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실 때 그분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연합해 우리의 조성과 요소가 되신다. 매번 우리가 떡을 땔 때 상위에는 두 가지 상징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 몸의 상징인 떡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피의 상징인 잔이다.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시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진정한 기념이다.

(위트니스 리, 새길 시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10-11)

1장과 2장에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이상과 신성한 삼일성의 경륜에 관한 이상을 보았다. 이 장에서는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하심에 관한 이상을 보기 원한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하심은 그분의 경륜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의 가정 관리이다. 고대에는 몇 세대의 가족이 함께 살았었다. 그러한 대가족에는 가족들에게 음식을 분배하기 위한 행정, 곧 안배가 필요했다. 구약에서 요셉은 가정 관리자, 즉 청지기의 좋은 예이다. 그는 바로의 집의 관리자였다. 양식의 공급은 요셉의 직분 아래 있었다. 그의 직분은 바로의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양식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경륜(dispensation)과 분배하심(dispensing)이란 용어사이의 차이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부유한 공급이신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분배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백성들 안으로 분배하시고자 하신다. 분배하심은 나누어 주는 것이며 배급하는 것이며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누림을 위해 그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나누어주시고 배급하시며 분배하고 계신다. 이러한 분배하심은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인한 것이다.

요한 일서 4장 9절은 (삼일)하나님이 독생자이신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생명을 얻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아들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분배하심이 우리가 그분을 생명으로 가지며 그분을 통해 살도록 하기 위함임을 계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은 (삼일)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보내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의 은사로서 우리 안으로 분배하셨는데, 이는 여자 안으로 나심으로 인한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로마서 8장 3절은 (삼일)하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분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분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오셔서 그분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은사로서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 오셨다. 로마서 8장 3절에 있는 진리는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주 예수님이 인용하신 민수기 21장의 놋뱀의 예표에서 볼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야에서 모세에 의해 들리 운 놋뱀은 뱀의 모양 안에 있긴 했지만, 그 안에 뱀의 독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이 모양 안에 계셨지만, 그분 안에는 죄가 없었다. 놋뱀으로서 십자가에 들리워지심으로 그리스도는 사단, 곳 옛 뱀을 처리하셨다(요12:31-33, 히2:14). 이것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뱀의 본성이 처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삼일 하나님이 오셔서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백성 안으로 분배하신 방식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p.37-41)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공허한 것이다. 온 우주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조차 공허한 것이다. 우주의 존재가 놀라운 기적이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기적인 우주의 존재도 공허하다.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되며 헛되다”(전1:2).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실제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축복이시다. 우리가 온 우주를 얻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들이 될것이다. 역사는, 많은 부와 물질적인 것들을 얻었으나 결국에는 하나님 없이는 모두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예들로 채워져 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축복이며 이 축복은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우리 안으로의 신성한 존재의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위트니스 리, 민수기 라이프 스터디, p.92)

신학 학도들은 보통 그들이 어떤 새로운 신학적인 용어들을 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침 받는다. 염려하는 것은 새로운 용어들이 이단을 정통 신학 안으로 받아들이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육십 년 동안 주님은 그분의 말씀들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으며 수세기 동안 가려져 왔던 많은 항목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러한 것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새로운 용어를 발명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그분이 택한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분배하심(dispensing)”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명사 “시대(dispensation)"와는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안배하신 다양한 시대들(ages)을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신성한 통치의 안배에 대해 말할 때에나 혹은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안배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시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분배하심(dispensing)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위트니스 리, 민수기 라이프 스터디, p.165)

설명

그리스도가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과정은 수박이 주스가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몇 년 전 대만에서 나는 아이들을 위해 큰 수박을 사왔다. 장난으로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큰 수박이 어떻게 그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큰 수박을 그들 안으로 넣는지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내가 큰 수박을 작은 조각들로 잘랐다. 수박이 작은 조각들이었기에 내 아이들은 쉽게 그것을 먹을 수 있었다. 내 아이들이 조각을 누렸지만 나는 그 조각들을 눌러서 쥬스가 나오게 했다. 그후에 모두가 쥬스를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결국에 수박이 통체로 눌려졌고 내 아이들의 배속 안에서 사라졌다. 몇 시간후 큰 수박은 그들의 존재의 각 부분으로 도달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영에 도달하시기 위하여 과정을 거치셨다. 하나님이 오신 모든 과정은 그분이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쥬스”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이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조각이 나고” “쥬스”가 될 때까지 “눌리웠다”.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수박쥬스같다.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마실 수 있다. 신약은 믿는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마시라는 강한 명령을 한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주 예수님은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고 계시록 22장 17절에서 그 영과 신부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셨다. 그 영으로서 주님은 우리 모두가 그분을 마시도록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영을 사용해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분은 우리 영에 도달하셨다.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첫 단계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29-30)

에베소서 4장 4-6절은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계시한다. 4절은 한몸과 한영이 있음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한 영은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이다. 이 영은 단지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커다란 수박이 과정을 거쳐 즙이 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커다란 수박은 조각이 나야 한다. 그다음 조각들은 즙이 생길 때까지 눌려진다. 즙은 수박의 “영”이다. 수박의 즙은 사실상 수박자체이다. 같은 방법으로 그 영은 “조각나고 눌려진 예수”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영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잘려지고” 죽음까지 “눌려진” 후의 그리스도이다. 지금 부활 안에서 그분은 영, “즙”이시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마실 수 있는 영이 되셨다. 우리의 필요는 그분을 마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나 매일 우리는 그분이 더 필요하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마시지만 한번의 마심이 우리의 온 일생동안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의 마심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생명수의 강을 마셔야하고(계22:1, 17) 생명나무를 먹어야한다(14절). 우리는 영원토록 먹고 마셔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34-35)

우리의 하나님은 삼일의 하나님이며, 그분은 과정을 거치셔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실 수 있다. 수박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려면 먼저 쪼개어져야 한다. 이 조각들은 씹어 먹을 때 즙이 된다. 온전한 수박, 조각들 및 즙은 “수박의 삼일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수박이 과정을 거쳐 즙이 될 때, 그것은 우리 안으로 쉽게 흡수되어 바로 우리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을 통해 과정을 거치셔서, 이제 그분은 그 영 하나님이시다. 오늘날 그 영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수박의 즙과 같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마셔왔다(고전12:13). 성경은 우리가 한 아버지나 한 아들을 마셨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온전한 수박이나 수박 조각들은 마실 수 없으나, 그 즙은 마실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결인 그 영을 마실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오늘날 “즙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다.

(위트니스 리, 교회의 역사와 지방 교회들, p.11)

믿는이들에게로의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전달은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15절에 계시되어 있다. 이 전달은 마치 전류의 전달과도 같다. 전기가 켜질 때 전기의 흐름, 곧 전기의 움직임이 있는데 이 움직임이 전달이다. 먼저 아버지의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다(15절). 이것은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것이 아들 안에 전달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아들의 모든 것은 그 영에 의해 받아들여진다(14b). 이것은 이러한 전달의 진전된 단계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달하시며 그리고 나서 아들로부터 그 영에게로의 전달함이 있다. 셋째로 아들에게서 받아들인 그 영의 모든 것은 믿는이들에게 알리워진다(13, 15b절). 결국 삼일성의 어떠하심과 그분이 지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삼일성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p.61)

과정의 단계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이르기 위하여 많은 단계들이 필요했다. 하늘에 계신 전능한 하나님은 하늘의 거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의 영 안에 도달하시기 위하여 많은 문제들과 장애들과 역경들로 통과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뱀의 본성을 처리하기 위하여 뱀의 형체로 죽음으로써 그분의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사탄과 세상과 죄 있는 본성과 자아와 옛 사람과 죄와 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현대식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같았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굽은 길을 곧게 하며 언덕을 고르게 하며 골짜기와 강에 다리를 놓으면서 건설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모든 골짜기에 다리를 놓았으며 모든 언덕을 고르게 했고 모든 굽은 길을 곧게 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성취했다(히9:12).

그분의 피흘림 외에도 그분에게서 물이 흘러 나왔다(요19:34). 그분에게서 물이 흘러 나온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해방된 것을 가리킨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b). 성육신 되셨고 이 땅 위에서 인생을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들어가셨고 사망에서 걸어 나오시고 사망과 음부와 무덤에서 해방되신 이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 생명주는 영으로서 이분은 이제 사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31-32)

삼일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의 과정과 부활을 통과하셨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분은 믿는이들 밖의 임마누엘이 될 수 있었지만 이것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의도의 오직 어떤 부분만 만족시킬 뿐이다. 그분이 외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은 다른 과정을 통과하셔야 했다. 두 번째 과정은 죽음과 부활이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의 물질적인 형태는 영적인 형태가 되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b).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신성한 삼일성의 임재인 임마누엘이시다. 이 임재는 항상 우리의 영안에서 매일매일뿐 아니라 매순간 매순간 우리와 함께 하신다(딤후4:22).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90)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하심 삼일 하나님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그분은 그분자신을 여호와,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항상 계실 분으로 계시하셨다(14절). 영원한 삼일 하나님 여호와는 생명주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몇 개의 과정을 거치셔야 했다. 이 생명 주는 영은 부활안에 그리스도,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결이신 완결된 영이 되기 위해 부활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체현으로 변화되신 그리스도이다(고전15:45b, 고후3:17-18, 계22:17a). 성육신과 부활전인 2000년 전에 삼일 하나님은 완결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신성만 갖고 계셨을 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았다. 신성과 인성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셔야 했다. 그리스도의 이 세 중요한 단계들을 통해 삼일 하나님은 완결되셨다. 생명 주는 영은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이신 영원하신 삼일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로서 갖고 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 행할 생명 주는 영으로서 단지 우리가 그분을 표현하고 살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계획인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97)

창조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은(창1:26-27)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 자신을 생명으로 소유하여 그분을 표현하기를 원하셨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하나님을 그의 생명으로 소유함으로써만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을 그의 생명으로 소유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18)

하나님의 경륜의 한 항목은 하늘과 땅의 창조이다. 창조에서 세 가지 종류의 생명이 산출되었다.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다. 이 세 가지 생명은 땅을 아름답게 한다. 동산의 나무들은 오직 먹기 좋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좋았다(창2:9). 동물의 생명은 땅의 아름다움에 더해졌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 없이는 이 땅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생명은 온 땅에 의미를 더했다. 하지만 만약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온 우주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 우주는 목표와 목적 없이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 확실하지만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몰라온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왜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했는지 모른다. 더욱이 그들은 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에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8 )

성육신

신약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심에 관한 첫 번째 요점은 그분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은혜와 실제로 영접할 수 있도록 성육신 되어 오셨다(요1:14, 14). 은혜와 실제는 모두가 사람의 영원한 분깃으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하기 위하여 성육신 되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은혜와 실제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은혜는 우리가 누린 하나님이시며, 실제는 우리가 얻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얻어진 바 되실 때 그것이 실제이다. 만일 우리가 우주 가운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도 하나님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공허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실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얻고 깨닫고 이해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가 되신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21-22)

그리스도는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생명으로 오셨다(요14:6a, 11:25a, 10:10b, 요일5:11-12). 그분이 사람에게 오심은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분은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신이 사람의 생명이라고 선포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역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처녀의 태를 통하여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오셔야 했는데, 이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기 위해 그분은 피를 흘리셔야 했다(히9:22). 그러므로 그분은 혈육의 몸이 필요했다. 그분이 이러한 몸을 얻는 유일한 길은 성육신 되는 것이었다. 성육신을 통하여 그분은 구속을 성취하기 위한 혈육의 몸을 얻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성육신을 통하여 오신 것은 다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하반 절에서 주님 자신은 그분이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부활로 오셨다(14:6, 11:25). 그러므로 그분이 오셨을 때 생명이 왔으며, 우리가 그분을 영접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다(요일5:11-12).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24-25)

삼일 하나님은 인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육신 되셨다(요1:14, 히2:14a). 성육신 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 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 되신 후에 그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 베들레헴 어느 주막의 말구유에 놓여진 한 아기가(눅2:7)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사9:6).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오늘날 많은 유대학자들처럼 구유에 놓인 작은아기가 여호와 하나님이었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믿는다. 출생하신 후에 그분인 이 땅에서 수년 간 사셨다. 어느 날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마16:21). 그분이 다만 군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하속들에게 체포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실상 그분은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셨다(요10:15, 18, 18:3-8). 그들이 그분을 체포하려 왔을 때 주님은 군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주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출3:14-15)의 뜻인 “내로라(I Am)"고 대답하셨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려졌다(요18:6). 그들이 여호와를 체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들에게 내주셨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54-55)

성육신은 임마누엘을 모셔왔다(마1:20-23).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거치신 첫 번째 과정이다. 성육신을 통해 신성이 여호와의 싹인(사4:2) 인성 안으로 가지를 뻗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있었지만 그 하나님은 단지 신성만 갖고 계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단지 신성만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인성도 갖고 계시다. 그분은 예수, 여호와 구원자이시다(마1:21).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은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다(23절). 그분의 이름은 예수였고 그분을 체험한 사람들은 임마누엘이라 불렀다. 지금 예수님, 우리의 임마누엘은 세 부분인 사람과 함께 하시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88)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표현을 위한 새 창조를 얻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더 전진된 창조와 옛 창조의 회복을 6일만에 끝내셨지만 옛 창조로부터 새 창조를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새 창조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행하셔야 했다. 영원과거안에서 신격의 세분 사이에 회의가 있었다(창1:26, 행2:23). 그 회의에서 신격의 두 번째인 아들이 새 창조의 중심성과 우주성이 되어야 하다고 결정되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삼일 하나님은 독특한 과정을 거치셨다. 이 과정의 첫 단계는 신성한 삼일성의 체현인 아들이 성육신을 통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신성은 인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영원과거에서 삼일 하나님은 단지 신 성안에 계셨으나 성육신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그분의 인성안으로 가지를 뻗었다. 그분은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둘 다 갖고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셨다. 아담의 후손들은 오직 사람의 본성만 갖고 있었고 영원 안에 하나님은 오직 신성한 본성만 갖고 계셨다. 하나님은 신성안에 계셨고 아담의 후손들인 우리는 인성안에 있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역인 신성안에 계셨고 우리는 우리의 영역인 인성안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에 이 두 영역은 서로서로 아무 관계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창조한지 4000년이 지난 2000년전에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신성과 함께 인성안으로 가지를 내셨다.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99-100)

요한복음은 신성한 분배에 관한 책이다. 요한복음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분배의 첫 번째 점은 성육신이다. 1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한 14절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요한복음의 주제가 신성한 인격의 그리스도이고 이 책은 그리스도를 바로 그 하나님으로 소개한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리스도 그분자신인 신성한 생명을 받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의 체현이 되었다(요1:4). 비록 내가 이 가르침을 60년전에 받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분배의 첫 단계가 성육신이라는데 깊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 지금 나는 성육신이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분배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가될 분명한 목적을 갖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영원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분이 사람이 된 과정은 마리아라는 처녀의 태에 들어가심으로였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한 위대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처녀의 태에 들어가 태어나기까지 9개월을 그 안에서 머무셨다. 하나님이신 말씀은 모든 사람의 출생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 육신이 되셨다. 그분은 잉태와 출생의 방법으로 오셨다. 그분은 예수라는 이름의 작은아기로 태어나셨다. 베들레헴 주위의 들판의 목자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러 왔다(눅2:12, 15-16). 아기였을 때 그분은 애굽으로 도망가서 갈릴리 지역의 비천한 동네인 나사렛이라는 마을로 돌아오셨다(마2:13-14, 19-23). 그분은 나사렛에서 삼 십 년 동안 살며 목수로 일하셨다. 사람이 회막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나이인 30이 되셨을 때 주 예수님은 전파하러 나오셨고 사실상은 분배하러 나온 것이다. 그분은 교리를 분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분배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이 그분자신을 분배하셨을 때 사람들은 매혹되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31)

그분의 의도를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성육신 하셨다. 성육신 전에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으로부터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는 그분이 혈과 육의 사람의 몸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히2:14). 신성한 삼일성의 성육신은 신성한 은혜와 실제를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말하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한다. 신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은혜는 우리에게 누림으로 주신바된 하나님 자신이다. 은혜는 좋은 집이나 좋은 차나 좋은 사업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하면서 은혜가 인격임을 나타냈다. 은혜는 사람이 받고 누린 하나님 자신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43-44)

요한복음은 분명히 처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자신이다. 그분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설명이요 표현이요 나타남이다. 어느날 말씀이신 이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요1:14a). 그 분이 처녀의 태안으로 들어가셔서 잉태되셨다.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따라 9개월 후에 그분은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말한 분이 바로 이분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태어난 이 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아들이고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외적으로 말하면 그분은 사람이지만 내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마1:23)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사람이시다. 그분은 놀라우신 하나님-사람이다.

(위트니스 리, 새길 실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11-12)

인생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왜 주 예수님이 매력적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쫓았다(마4:18-22). 그분은 마치 거대한 자석과 같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그분은 모든 종류의 남자와 여자 심지어는 높은 관원의 아내까지도 매혹시켰다. 그분이 체현된 하나님을 사람들 안으로 주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그분의 사역의 삼년 반 동안 그분을 따랐다. 기독교의 많은 이들이 주님은 오직 이 때에만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관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 얕다. 제자들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받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산 인격을 받았다. 이 인격은 그들 안으로 분배되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1-32)

주님은 그분의 인생에서 멸시받는 나사렛사람이셨다. 마태복음 2장 23절은 말하길,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라”고 했다. 나사렛사람이란 명칭은 이사야서 11장 1절의 히브리어 넷저(netzer)인 ‘가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 가지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다윗의 보좌는 폐위되었다. 그것은 다윗의 왕족의 줄기가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지금 이새의 뿌리로부터 새 싹이 나와 자랐다. 이 싹이 나고 자란것은 인성의 상황에서 였다. 예수님은 명성있고 귀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예루살렘과 같은 유명한 도시에서 자라지 않으셨다. 그분은 가난한 집에서 나셔서 멸시받는 동네에서 자라셨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을 나사렛사람과 가지가 되게 하셨는데 그 가지는 품위 있는 나무의 고상한 가지가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싹이었다......

나사렛사람으로서 주 예수님은 세상에게 거절당하셨다(마2:13b, 21-22). 주 예수님은 진실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고 위대한 왕 다윗의 참 왕족의 후손이였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의 신분에 따르면 그분은 높이 여겨지며 높이 찬양 받으셔야 한다. 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신 방법과 그분이 자라신 환경 때문에 그분이 높이 여겨지고 찬양받았다는 표시가 없다. 더욱이 그분의 외모는 사람들의 눈을 매혹할 어떤 아름다움도 없었다. 게다가 그분의 생활은 그분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고 그분이 일하시는 방법은 사람들의 관념으로볼때 아주 특별했다. 그분의 낮은 인성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의 신분의 훌륭한 모든 방면들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상사람들의 세상점인 관점에 의해 절대적으로 거절당하셨다.

나사렛사람으로서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받으셨다. 그분이 나사렛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나사렛예수라고 불렀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았다. 그후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가서 그가 메시야를 만났고 그가 나사렛에서 온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즉시 나다나엘이 말하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했다(요1:45-46). 비록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온 나사렛사람이었지만 그분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나사렛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주님이 나사렛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은 그 당시 사람들이 멸시하던 갈릴리의 나사렛사람(요7:52)으로 보였다. 멸시받는 나사렛사람으로 주 예수님은 계급과 지위에서 낮았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65-2766)

그분의 인생과 역사에서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표현했다(요14:9).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와서(5:43)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했고(10:25) 아버지의 뜻을 행했고(6:38) 아버지의 말을 했고(3:34a, 14:24, 7:16-17, 12:47-50) 아버지의 영광을 구했다(7:18).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였다(10:30). 그분은 그분자신을 위한 일도 뜻도 말도 영광도 야망도 없었다. 그러한 분으로 그리스도는 오직 아버지만을 표현했다. 그분은 그분자신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분은 아들이었지만 그분은 아버지를 표현했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69)

십자가에 못 박히심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인간 생명을 사람을 위해 버리셨다(요10:11, 15b, 17-18a). 주 예수님은 두 가지 생명을 가지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 생명은 신성한 생명이며(요10:28a) 그분이 우리를 위해 버리신 생명은 그분의 사람의 생명, 곧 그분의 혼 생명이다(요10:11). 그분은 사람의 생명 안에서 죽으셨지만 그러나 신성한 생명 안에서는 살아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은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그분의 사람의 생명을 죄 있는 사람을 위해 버리셨다가 다시 취하셨다(요10:18a).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다시 취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일어나신 것을 의미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신성한 생명을 믿는이들 속에 분배할 수 있도록 이 생명을 해방하셨다(요12:24). 신성한 생명은 우리가 영접할 수 있도록 이미 해방되었으며, 그것을 영접하는 길은 다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 것이다(요3:15-16, 36)......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셨다. 이 두 가지는 그분에게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상징된다(요19:34).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오셨으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성육신 안에서의 그분의 계속되는 노정이었다. 그분의 노정의 정착지는 무엇인가? 성육신을 통한 삼일 하나님의 노정의 종착지는 사람의 영이다.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영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아직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종착지에 이르기 위하여 삼일 하나님은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셔야 했다. 죽음을 통하여 그분은 구속을 이루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의의 삼중 요구를 이룰 수 없으므로 구속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요구가 만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올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과 의가 만족되었다. 이것이 피흘림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죽음의 소극적인 방면이다(요19:34).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25-27)

주 예수님은 구속을 위하여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요1:29, 고전15:3b, 히2:14b, 요3:14, 12:31-33, 갈6:14, 롬6:6, 갈2:20a, 5:24, 요12:24). 주 예수님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주된 소극적인 항목들-죄(죄들을 포함함, 요1:29, 고전15:3b), 사단(히2:14b, 요3:14), 세상(요12:31-33, 갈6:14), 옛사람(롬6:6), 육체(갈5:24),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포함하는 “나”(갈2:20a)를 처리하셨다. 이외에도 주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은 한 가지 적극적인 일, 즉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는 일을 성취하셨다(요12:24).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적어도 그 성취에 있어서 일곱 방면이 있다. 주 예수님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은 그분의 최종 완성된 삼일의 존재 안에 강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죽음을 통하여 그분은 구속한 백성들을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히9:12).

(위트니스 리, 세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 p.5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역사의 소극적인 최종 완성이다(고전1:17-18, 갈6:12).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없이 하였고(히9:26), 마귀 사탄을 없이 하셨으며(히2:14, 골2:15), 세상과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갈6:14b, 2:20a),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롬6:6).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또한 율법의 규례들도 폐하였다(엡2:15, 골2:14).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최고의 규례들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음식을 구별하여 먹는 것 등에 관한 것이다. 인간 족속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규례들이 있다. 규례들이란 생활하고 경배하는 형식들, 혹은 방식들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규례들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룬 참된 하나 됨을 가질 수 있다.

(위트니스 리, 그 영, p.130)

주님의 삼년 반 동안의 사역이후, 주 예수님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셔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의 주된 목적은 죄를 가져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지셨다(요12:24).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묻히기 전에는 그대로 남아있다. 흙안에서 밀알은 죽고 죽음을 통해 밀안에 있는 속 생명이 해방된다. 그리스도의 만유를 포함한 죽음의 주된 방면은 그분의 신성한 생명의 해방이다. 신성한 생명의 해방은 신성한 생명의 분배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2)

십자가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성한 분배의 한 부분이다. 성육신 하신 아들의 죽음은 신성한 분배를 위하여(요12:24, 19:34) 그분안의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한다. 밀알의 껍질 속에는 밀의 생명이 있다. 밀알이 죽는 것은 그 껍질 안에 있는 생명의 해방이다. 껍질 안에 생명은 껍질이 부서질 때까지 해방될 수 없고 껍질이 부서질 때 그 안에 생명은 해방되어 많은 밀알들을 산출한다. 첫 번째로 이것은 한 밀알이다. 그다음에 많은 밀알들이 된다. 이것은 한 밀의 속 생명이 많은 밀알들로 분배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로서 예수님은 신성한 씨앗이였다. 이 신성한 생명은 그분의 “껍데기”안에 감추어져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셔서 죽음에 놓였을 때 그분은 껍질을 깨고 그분의 속 생명 신성한 생명을 그분의 많은 믿는이들인 많은 밀알들 안으로 해방하셨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45)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의 성취를 위하여 아들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과정을 통과하셨다. 그분은 자원하여 그분 자신을 드려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죄와 옛 사람과 사탄과 세상과 옛 창조와 모든 소극적인 것들을 다루시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사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 안으로 분배하셨다(요12:24)

(위트니스 리, 새길 실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12-13)

부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물로 상징된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다(요19:34).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적극적인 방면이다. 그분의 신성한 생명은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그분의 인성의 껍질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요12:24). 부활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b). 생명 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명이 되기 위하여 성육신을 통한 그분의 노정 안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셨다. 그분의 첫 번째 단계는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마1:23). 그분의 두 번째 단계는 그 태에서 나와 하나님-사람이 되시는 것이었다. 그분의 세 번째 단계는 인생 안에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시는 것이었다. 그러한 행함의 목표는 사람의 영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생명 주는 영이 되기 위해(고전15:45b)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셔야 했다. 그 영으로서 그분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있다.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그분은 종착지에 도달하신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27-28)

죽음을 통과하신 후 삼일 하나님은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부활 안 그분은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드셨다(벧전1:3, 요1:12, 롬12:5).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가져왔으며, 그분의 부활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종류의 왕래를 통하여 놀라운 연합이 발생했다. 이제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연합되고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이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러한 연합 안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믿는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이들에게 “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믿는 자들은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은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우리가 부활 안에 살 때마다 우리는 인성을 신성 안으로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 안에 살 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으로 가져가며 우리가 부활 안에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오늘날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로마서 6장 4절과 5절은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 받음을 통하여 장사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5절)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행하도록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한다(4절). 우리가 부활안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 안으로 이끌려지고 있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55-56)

죽음을 통과한 후에 주 예수님은 부활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의 죽음은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고 그분의 부활은 신성한 생명을 적용했다. 부활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벧전1:3).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출생전인 2000년전에 거듭났다.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의 천연적인 출생 전에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거듭남을 두 번째 출생이라 여긴다. 이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반드시 우리의 두 번째 출생이 우리의 첫 번째 출생보다 먼저 일어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물질적으로 태어났고 그 다음 영적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던 2000년 전에 거듭났다. 우리는 베드로 전서 1장 3절에서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거듭남과 함께한 부활을 통해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안의 그분의 존재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더 이상 구유나 십자가나 무덤이나 음부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다만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다. 만약 그분이 오직 하늘에만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시겠지만 지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 그분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깝고 친근하시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은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으나 결코 우리 안에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너무 작지만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부활안에서 주님은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b). 그분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 여기서 성령은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으로서 거룩한 호흡이었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이었다. 그후 그분은 잉태되시고 구유에서 작은아기로 태어나셨다. 그분은 나사렛에서 사람으로 사셨고 여행하시며 사역하시기를 시작했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로 무덤으로 음부로 가셨다. 그후 부활안으로 들어가셨다. 부활안에서 그분은 영이 되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후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무신다. 태초에 말씀이었던 이 놀라우신 분은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완결되고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신 만유를 포함한 생명 주는 영으로 계신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32-33)

첫 번째로, 하나님은 성육신 하여 사람이 되셨고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그분자신을 사람에게 주사 사람이 그분을 영접할 수 있게 했다. 그후사람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죽음을 통과하여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후 그리스도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의 부활은 신성한 분배를 위하여 신성한 생명을 거듭난 믿는이들 안으로 나누어주었다(요3:5, 벧전1:3b).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의 인성의 껍데기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고 부활은 신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적용했다. 이 적용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루어졌다. 우리는 모두 육체로 태어나서 영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었다. 요한복음 3장 6절이 말하길,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다. 우리의 두 번째 출생에서 우리의 영은 부활안에 그리스도이신 그 영으로 거듭났다. 베드로 전서 1장 3절은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한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후에 거듭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2000년 전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거듭났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부활안에서 육체 안에 사람인 마지막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가 부활안에서 제자들 안으로 호흡하신 것은 신성한 분배를 위하여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로서 완결된 영을 분배했다(요20:22). 그리스도는 풍성하시고 많은 방면들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성육신 하여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그 후 십자가에서 죽으시어 우리를 위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 그리고 난 후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더욱이 그분은 또한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였고 하늘에서 그분은 구주이시며 우리안에서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부활하신 날 저녁 그분은 비밀스럽고 놀라운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다. 그분은 그들이 있던 방으로 들어오셔 그들에게 호흡하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19-22). 요한복음 20장은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셨는지만 말하고 어떻게 떠나셨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날 저녁이후 예수님이 어딜 가셨는지에 대해 찾기가 어렵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부활 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말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분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그분 자신을 거룩한 호흡으로 그들 안으로 내쉬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제자들 안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것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하심, 영문판 p.45-47)

아들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안에서 그분은 변형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로 오셔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에게 인사하고 그들 안으로 호흡하셨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요20:8-9, 19, 22). 이 영은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도달한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완결로서 이 영으로 삼일 하나님은 믿는이들 안으로 분배되신다.

(위트니스 리, 새길 실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13)

승천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뛰어나게 위대한 능력으로(엡1:9) 우주 안에 모든 것 보다 더 멀리(엡1:21) 우주의 꼭대기로(엡4:8) 모든 하늘 위로(엡4:10) 승천하셨다......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하신 후 그분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시110:1a, 히1:3b). 이것은 그분이 이 땅위에서의 구속의 역사를 끝내셔서 앉아 계실 수 있고(히10:11-12) 또한 그분이 그분의 대적들을 이기시어 하나님이 그분의 대적을 그분의 발등상 만들기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계신다(시110:1b, 히10:13, 고전15:24-25).

그리스도가 모든 하늘 위로 승천하시고 위대한 분의 우편에 앉으셨을 때, 하나님의 왕국의 보좌에 앉으사(계3:21) 하나님을 위하여 우주를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받으셨다. 더욱이 그분은 영광과 존귀로 면류관을 쓰셨다(히2:9). 영광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된 광채를 나타내고 존귀는 그분의 가치의 소중함과 그분의 위치의 존엄을 나타낸다.

(위트니스 리, 진리 공과, 영문판 p.106-107)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십 일 간 머무시면서(행1:3) 그들에게 그분의 보이는 임재와 보이지 않는 임재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셨고 그 후에 감람산에서 삼층천으로 승천하셨다(행1:12, 9). 승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그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 그분의 승천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 모두가 주님의 승천 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셨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53 )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을 생명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성육신 안에서 오신 후에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이들 속에 들어와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여 그들의 생명이 되신다(요3:5-6, 1:13).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은 삼일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언급하며, “그리스도”는 아들 하나님을, 그리고 “그 영”은 그 영 하나님을 언급한다. 삼일 하나님은 그 영으로 믿는이들 속에 들어오시는데, 이는 오늘날 그 영이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이 올 때 신성한 삼일성의 세 분 모두가 온다. 삼일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믿는이들 속으로 들어오신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실 수 있는 합당한 위치와 자격을 갖게 된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33)

삼일 하나님은 생명 주는 영이 되시기 위하여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핵심적인 단계를 취하셨다. 먼저, 그분은 성육신 되셨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 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 번째로, 그분은 삼십 삼 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 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분의 죽음 후에 부활안에서 그분은 제자들을 방문하셨다(요20:19, 눅24:36). 제자들은 그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눅24:37), 어떻게 그분이 문도 열지 않고 방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삼 일 전에 주 예수님은 육신의 몸 안에서 그들과 함께 떡을 드셨지만(눅22:19) 그러나 그날 밤 그 방안에 오셨을 때 그분은 부활한 몸으로 오셨다. 주 예수님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분의 손과 발을 만져 보게 하셨다(눅24:39).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십 일 간 머무시면서(행1:3) 그들에게 그분의 보이는 임재와 보이지 않는 임재를 나타내셨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셨고 그 후에 감란산에서 삼층천으로 승천하셨다(행1:12, 9). 승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그분의 과정을 완성하셨다. 그분의 승천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 모두가 주님의 승천 안에서 완전히 완결되셨다.

“완결”이라는 단어는 일이나 혹은 과정이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으로 예시될 수 있다. 요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식품은 날것이다. 두 시간 동안 요리된 후에 식품은 만찬으로 최종 완성된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 이셨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 완성되셨다. 이제 그분은 더이상 “날것”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능력 있는 부활과 그리고 초월하는 승천을 지니신 최종 완성되고 완결된 삼일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들은 과정을 거치고 최종 완성 되신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요소이자 성분들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53-54)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삼일 하나님은 복합적인 만유를 포함한 내주하는 영이 되기 위해 최종 완성되셨다(촐30:25). 이 영은 과정을 거치고 최종 완성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30장에서 하나의 관유가 예비되었는데, 이 관유는 네 가지 서로 다른 향품과 복합된 기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복합적인 관유라고 불리워졌다(22-25절). 이 복합적인 관유는 인성과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부활과 그분의 초월하는 승천으로 복합된 삼일 하나님이신 복합적인 영의 예표이다. 이 복합적인 영은 최종 완성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p.56)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신성한 삼일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왔다. 신성한 삼일성은 아들 안에서 체현 되었다(골2:9). 삼일 하나님의 체현으로서 아들은 그분의 모든 제자들에게 보혜사였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이 임박했기에 제자들은 아마 그들의 보혜사이신 주님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아버지에게 구해 또 다른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을 준비시키셨다. 두 번째 보혜사는 첫 번째 보혜사의 다른 형태이다(요14:16-20).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나”는 임마누엘이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오실 “나”는 17절의 실제의 영이다.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에는 신성한 계시의 발전이 있다. 오늘날 실제의 영은 임마누엘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 들에서 실제의 영은 우리 영안에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바로 그 임재이다. 삼일하나님은 주로 내적인 방법으로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인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 밖에서 우리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는 의도를 완성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항상 내재적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영문판 p.89)

그분자신을 창조 안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셔야 했다. 성육신 전에는 하나님은 신성안의 삼일 하나님이셨지만 성육신과 인생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통과한 후에는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b). 생명 주는 영은 신성뿐만이 아니라 인성도 갖고 있다. 그분은 또한 그분 안에 인생의 요소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의 과정의 모든 요소들은 생명 주는 영안으로 복합되었다. 이 복합된 영은 출애굽기 30장 23절부터 25절의 관유로 예표 되었다. 출애굽기 30장에서 관유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 복합되어있는데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와 감람유이다. 이 다섯 요소들은 신성과 인성과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나타낸다. 감람유 한 힌은 복합된 영의 기초인 유일한 하나님을 나타낸다. 네 종류의 향료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낸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소중한 죽음을 의미하며 육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달콤함과 효능을 나타내며 창포는 그리스도의 소중한 부활을 나타내고 계피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능을 나타낸다. (출애굽기 라이프 스터디 메세지 157-166참조). 이 네 가지 향료들이 감람유에 더해진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영에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결국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사람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의 모든 요소들과 함께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이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 주는 영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이 영안에 복합된 모든 요소들-그분의 신성과 인성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해야 한다. 생명 주는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총체인 그러한 만유를 포함한 인격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02-103)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신성한 삼일성의 세 번째인 하나님의 영은 신성한 삼일성의 총체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되고 복합적인 영과 심지어는 과정을 거친 하나님의 완결로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b, 요7:39, 마28:19b, 빌1:19b, 계22:17). 생명 주는 영은 너무나 위대하다. 그분은 신성한 삼일성의 총체요 집합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총체는 생명 주는 영이다. 그분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되고 복합된 영이다......

오늘날 성령, 생명 주는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완결되신 하나님으로 체험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영을 체험해야만 한다.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함은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생명 주는 영이신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의 완결을 누리는 문제이다. 내가 이것을 본 날부터 나의 온 그리스도의 생활은 대 변혁이 일어났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 되신 삼일 하나님, 영문판 p.133-134)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거듭남과 함께한 부활을 통해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은 지금 우리안에 계신다. 우리안의 그분의 존재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더 이상 구유나 십자가나 무덤이나 음부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다만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우리안에 계신다. 만약 그분이 오직 하늘에만 계신다면 그분은 우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시겠지만 지금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안에 계신다. 그분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에게 더 가깝고 친근하시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은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으나 결코 우리안에 있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안에 계신다. 우리는 너무 작지만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은 우리안에 거하신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2-33)

하나님의 경륜을 체험함

우리는 신성한 분배를 받는 것이 매일 매일 극적이라고 기대해서는 않된다. 최근에 나는 전시간 훈련에서 매일의 영적 생활에 대해 훈련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극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극적인 것을 갖는 것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분배 안에 정기적이고 정상적인 것들로 채워진 평범한 날들에 만족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아침에 우리는 주님을 만지고 주님으로 부흥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후 우리는 일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을 통과해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성한 분배 안에서 삶을 사는 것은 우리를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좋은 날을 보내거나 나쁜 날을 보내거나 이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이미 등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 받았다. 그분은 우리안에 계시는데 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매우 평범하게 계시다.

우리는 신성한 분배 안에 평범한 날들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축복 받아야 한다. 삼일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안에 계시지만 우리안에 그분의 존재는 극적이지 않다. 매일매일 그분은 우리안에서 분배하시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격려하신다. 지난 삼년동안 나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지만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메세지들을 출판했고 더 많은 장소들을 방문했으며 더 많은 특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극적인 날들을 보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분의 분배하심을 받는 평범한 생활을 살았다. 서신서들은 우리안의 그리스도의 역사가 분배의 정교한 역사라고 말한다. 나는 지난 삼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교한 분배가 내 안에서 있었는지를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운명은 신성한 분배안에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계속되는 분배아래서 평범하게 살기를 운명지으셨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7-38)

지금 하나님은 이 신성한 분배를 성취하셨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우리는 지금 잔치에 와서(눅14:17) 하나님을 호흡하고 하나님을 먹고 마실 수 있다. 공기와 같이 공기 같으신 그리스도를 호흡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존재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호흡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고 생수로서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고(요4:10, 14, 7:37-38),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생명요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가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요6:48, 57b-58a).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된다. 단지 우리에게 연결될 뿐 아니라 우리와 연합된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모든 것은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의롭다함과 성화와 구속과 함께 인내와 겸손과 순종과 같은 인간 미덕들도 갖고 있다.

우리가 매일 매일 그분을 호흡하고 먹고 마시는 동안 우리는 자연적으로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급 안에서 자라고 열매맺는 문제에서 유기적으로 풍성히 공급받을 것이다(요15:1, 4-5).

(위트니스 리, 새길 실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14)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는 생명 안에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이 독특하지 않고 매우 정상적임을 알고 있다. 우리안에 하나님을 갖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느낌을 갖을 거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있을 때 그는 단순히 그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과 문제가 있을때 즉시 그는 그 안에 잘못된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심을 보여준다. 그 영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배가 측량할 수 없기에 우리는 신실하게 그분과 교통해야 하고 그분이 그의 영으로 우리를 채우시도록 허락해드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분은 그분자신을 풍성하게 우리안으로 분배하실 수 있다. 이것은 이상한 느낌이나 특이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 오순절운동에서 알려진 소위 말하는 성령의 채워짐이 아니다. 대신에 이것은 하나님의 분배와 하나님 자신을 누림의 진정으로 받는 것이다.

매일 우리는 그 영의 이러한 채우심과 이러한 하나님의 분배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분배를 성취하셨다. 우리편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그분의 분배하심을 취하는 단계가 필요한데 이것은 시간을 들여 그분께 나아오고 그분을 접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매일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갖고 주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을 우리안으로 받고 그분에 의해 채워져야 한다.

(위트니스 리, 새길 실행을 위한 신성한 분배의 이상과 안내, 영문판 p.31-32)

거듭남

최종 완성되신 후에 삼일 하나님은 발아시키는 인자와 요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안에 오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거듭남은 우리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입하는 것 이상이다. 거듭남은 우리의 존재를 바꾸고 새로운 출발을 가져오기 위하여 어떤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발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어떤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와서 어떤 다른 종류의 존재가 새롭게 시작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어떤 한 종류의 존재였다. 이제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존재의 시작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들어오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산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벧전1:23, 약1:18). 베드로 전서 1장 23절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젊어서 내가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나의 거듭남의 체험이 이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서 괴로왔다. 내가 거듭날 때 나는 전혀 성경에서 어떤 말씀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다만 출애굽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하나님에 관한 메세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거듭난 이후 나는 많은 다른 믿는이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소수만이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통하여 거듭난 체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사용한 형제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받은 젊은이였다. 그 형제는 이 젊은이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도록 도와주었다. 먼저 그들은 신약에 있는 대로 그 구절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서 그 형제는 젊은이에게 “세상”이라는 말을 “나”라는 말로 바꾸어 읽도록 권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읽었다. 이렇게 읽음으로써 그 젊은이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구원받았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된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p.34-35)

죽음을 통과한 후에 주 예수님은 부활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의 죽음은 신성한 생명을 해방했고 그분의 부활은 신성한 생명을 적용했다. 부활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벧전1:3). 우리는 우리의 천연적인 출생전인 2000년 전에 거듭났다. 우리의 거듭남은 우리의 천연적인 출생 전에 일어났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거듭남을 두 번째 출생이라 여긴다. 이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반드시 우리의 두 번째 출생이 우리의 첫 번째 출생보다 먼저 일어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우리는 먼저 물질적으로 태어났고 그 다음 영적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던 2000년 전에 거듭났다. 우리는 베드로 전서 1장 3절에서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2)

호흡

요한복음은 신성한 분배에 대하여 두 노선을 갖고 있다. 첫째로 놀라우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다. 그 후 그분은 성육신 하셔서 우리에게 아들로 오셨다.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 그분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호흡하셨다. 이것이 첫 번째 노선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노선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안으로 분배되시는지를 보여준다. 거듭남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안으로 오셨고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후에 그는 호흡하고 먹고 마셔야 한다. 공기와 같은 그리스도는 믿는이들의 호흡, 신성한 본질을 그들 안으로 분배하는 것을 위한 것이다. 부활안에서 그리스도가 생수를 주셨고 신성한 풍성을 믿는이들 안으로 분배하셨다(4:14). 믿는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분은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의 만족을 위하여 신성한 요소들을 분배하신다(6:56-58a).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35, 48절), 하늘에서 내린 떡(32절), 하나님의 떡(33절), 산 떡(51절)으로 우리가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47)

먹음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담는 그릇이 되기를 갈망하실 뿐만 아니라(롬9:21, 23, 고후4:7) 또한 사람이 그분을 먹고 소화시켜 동화시키시길 원하신다(요6:57). 우리가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 소화시켜 동화시키면 우리는 힘을 얻고 강건해 진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의 피안으로 분배되어 피를 통하여 우리 몸의 각 부분으로 분배된다. 결국 우리가 먹은 음식은 우리 존재의 섬유소와 조직과 세포가 된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그분 자신을 우리안으로 분배하사 그분이 우리 내적 존재의 각 섬유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소화시키고 동화시키어 그분이 우리 내적 존재의 구성요소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사 사람이 그분을 담게 하셨다. 그릇은 항상 담게 되어 있는 내용의 형상이나 모양이다. 만약 내용이 둥글다면 그릇 역시 둥글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창조는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분배되심을 위함이다. 사람이 창조된 후에 하나님은 생명나무 앞에 사람을 두셨다(창2:8-9). 그후 즉시 하나님은 그에게 먹는 것에 관해 경고하셨다(16-17절). 만약 사람이 생명나무를 먹는다면 그는 살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를 먹는다면 죽을 것이다. 생명나무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의 음식이다. 그분은 먹을 수 있는 분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생명의 떡이라(35, 48절)하셨고 57절에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피로 씻김 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나는 것 이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또한 성장과 성숙을 포함한다. 거듭남에서 성숙까지 이르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 거듭남은 우리의 영적 삶의 시작이나 거듭남 후에 우리는 먹어야 한다. 아무도 먹지 않고 자랄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매일 매일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동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일매일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먹고 소화시키고 동화시켜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9-10)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사람과 함께 하나됨은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고 동화시킬 때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러분이 샌드위치를 먹을 때 여러분의 위는 샌드위치의 내용물을 소화시키고 동화시키기 위해 역사 한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분배이다. 소화와 동화되는 분배이다. 몇 시간 후에 여러분 안에 샌드위치는 사라져 여러분과 하나가 된다. 결국 샌드위치는 여러분과 연합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갖기를 원하는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먹을 수 있게 만드셨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다(요6:35, 57)......

우리 하나님은 먹을 수 있다. 그분은 구원과 구속을 위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은 음식으로도 좋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를 먹었다(출16:14-15, 21). 그들은 40년동안 만나의 공급으로 살았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참 만나라고 계시하셨다. 일년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분을 먹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매일의 만나이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매일 먹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그분을 먹어야 하고 우리는 매일 그분으로 부흥되어야 한다.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뜨기 전에 만나를 주서야 했는데 그것은 해가 뜨면 뜨거워져서 만나가 녹기 때문이었다(출16:21). 우리의 아침 부흥하는 실행과도 같다. 우리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게을러서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만나를 놓칠 것이다. 해 뜨기 전에 매일의 만나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이것이 신성한 말씀 안에 신성한 사상이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0-31)

사람의 영

생명 주는 영이신 삼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자 갈망하시지만 만일 사람에게 그분을 영접하고 담을 수 있는 영이 없다면 삼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시간 동안 비가 돌 위에 내리지만 그러나 그 돌은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합당한 기관이 없기 때문에 물을 영접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비가 스폰지 위에 내린다면 잠시 후에 물은 스폰지에 침투해 그것을 적실 것인데, 이는 스폰지가 물을 담을 수 있는 합당한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폰지는 물과 연합될 것이다. 이것은 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생명의 수신자와 그릇이 될 수 있는가를 예시한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은 신성한 생명의 수신자와 그릇이 되도록 영을 갖고 창조되었다(창2:7, 잠20:27). 창세기 2장 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말한다. 이 생기는 사람의 영이 되었다. 잠언 20장 27절에서 영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네샤마(neshama)"인데 동일한 단어가 창세기 2장 7적에서 ”호흡“으로 사용되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언급된 생기는 바로 사람의 영이다. 잠언 20장 27절은 사람의 영은 주님의 등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위해 우리의 영을 사용할 때 복합적인 영은 즉시 우리안에 들어왔다. 그분을 영접한 후에 우리는 그분을 생명의 영으로 갖고 있다.

1963년에 내가 처음으로 미국을 여행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디에 가든 사람의 영을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그러한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내 말을 입증하기 위하여 내가 자주 제시했던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4장 24절과 3장 6절과 그리고 로마서 8장 16절이었다. 이 구절들에는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라는 두 영이 언급되어 있다. 내가 이 구절들을 읽어 줄 때 많은 사람들이 빛 비춤을 받았다. 그 당시 아마도 나는 미국에서 사람의 영에 관해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영에 관한 진리를 취하여 그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사람의 영은 우리 위와 같다. 우리 육신의 위는 매일의 음식을 위한 수신자이자 그릇이다. 매일 우리는 입을 통하여 음식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입은 위의 입구이며 위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음식의 그릇이다. 위가 음식을 담고 있는 동안 그것은 음식을 소화하고 흡수한다. 결국 위가 흡수한 것은 무엇이든 각 세포에 전달된다. 우리의 영은 영적인 위이다. 매일 우리는 영적으로 먹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먹을 수 있으며(요6:35, 51, 57)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와서 마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요7:37).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영적인 음식으로 영접한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영문판 p.53-55)

성장

동화의 역사는 분배의 좋은 설명이다. 먹고 난 즉시 분배의 정교한 역사는 음식을 우리 몸의 세포와 섬유와 조직으로 분배하려고 시작된다. 같은 방법으로 삼일 하나님의 분배는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바로 그 조성으로 만든다. 분배의 이 정교한 역사는 매일 매일 계속되고 그 영의 인치시는 잉크가 우리 온 몸을 침투할 때 끝난다(엡1:13-14). 이것이 우리가 영화롭게 될 때 우리 몸의 구속이 될것이다(롬8:23).

우리안으로 분배되시는 삼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라심으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골2:19). 어떤 것이 자라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나 물질이 증가해야 한다. 사람은 그들이 먹는 음식으로 자란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랄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증가와 넘침과 더함으로 자란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안으로 들어오셨다. 지금 그분은 우리안에서 그분자신을 더 우리에게 더하심으로 자라신다. 하지만 하나님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각 형제 자매마다 다르다.

우리안에 주님의 증가가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와 먹어야 한다. 찬송가 586장의 1절은 어떻게 주님께 나와 주님을 먹는지 보여준다:

주여 내 영과 맘 목마르고
배고파 주앞에 나왔으니

당신 자신을 공급하소서
주만이 내 능력 생명공급

날 먹이소서 먹이소서
내 배고픔을 채워주고

목마름을 해결해주소서
기쁨얻도록 먹이소서

우리는 또한 반드시 주님을 먹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많은 때 방문을 닫고 무를 끓고 기도할 시간이 없지만 내가 말할수 있는 것은 나는 종종 기도의 영을 갖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어떤 열망이 있고 이 열망은 나로 주님을 아주 많이 호흡하게 한다. 그것은 나로 하여 살아 계시고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하나님을 내 존재 안으로 들이마시게 한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33-34)

변화

우리는 생명 주는 영의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의 천연적인 존재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구원된다(롬12:2b). 변화는 단지 외형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유기적인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 내적이며 신진대사적인 바뀜이다. 나의 얼굴색이 창백하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얼굴색을 바꾸기 위하여 얼굴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할 수 있다. 그것은 내 얼굴색이 바뀌는 것일 뿐 변화는 아니다.

변화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변화는 신진대사적인 교체이다. 이 신진대사적인 교체는 어떤 유기적인 것이 살아 있는 존재 속에 들어옴으로써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신진대사적인 교체는 한 면으로는 우리의 존재에 새로운 요소를 공급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 존재로부터 낡은 것을 배출함으로써 새로운 성분이 더해지는 것이다. 옛 것은 배출되고 새로운 요소가 우리 존재와 연합된다. 이것이 신진대사의 교체를 가져온다. 바울은 유기적인 교체의 필요를 강조하기 위하여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유기적인 교체는 우리의 옛 본성의 요소를 배출하고 새로운 요소로 우리를 공급하기 위하여 신성한 요소가 우리 존재 속에 더해짐으로써 발생한다. 우리는 천연적인 존재로부터 생명 주는 영에 의하여 변화된다. 우리는 날 때부터 매우 친절하고 온유하고 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당신의 천연적인 존재이며 변화되어져야 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변화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는다(롬12:2b). 이전에 우리의 생각은 육신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둠으로써 그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롬8:6). 생각의 위치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요소 안에서 신진대사에 의해 변화된다(골3:4).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 어떠한 유기적인 생명 안에든지 유기적인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안에서 자라나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유기적인 요소이다.

(위트니스 리, 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p.76-77)

교회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과 아들의 구속과 그 영의 인치심을 통한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의 결과는 교회이다(엡1:22b)......

신성한 분배의 결과로서의 교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전달과 분배를 통해서 있다(엡1:19-22a).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데서 역사 했다. 그리스도는 음부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부터 삼층천의 하나님의 보좌까지 들림 받았다.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했고 그분은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22절의 말씀은 전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 역사하신것은 교회에게 전달되었고 전달되고있다.

(위트니스 리, 신성한 경륜의 신성한 분배, 영문판 p.14-15)

하나님의 목표는 교회이며, 교회는 단체적인 문제이다. 에베소서는 일곱 주요 방면, 즉 몸(1:22-23), 새 사람(2:15), 왕국(2:19), 권속(2:19), 하나님의 거처(2:21-22),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5:23-32), 그리고 전사(6:10-20)로서의 교회를 계시한다. 교회의 이러한 면들은 모두 단체적인 문제들이다. 수 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문제들과 혼란과 분열들은 성도들이 단체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보지 못함에 기인한다. 과거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 성화와 영성의 필요, 거룩한 말씀의 준수, 세상을 사랑치 않는 것과 이 땅에서 주님의 권익과 역사를 위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항목들에 관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영혼을 얻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복음 전파를 위해 다른 나라에 갈 정도로 복음에 대해 불탈 필요가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항목들은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라 그분의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의 목표만이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유일하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이다.

교회는 다만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교회 시대이다. 다음 시대는 천년 왕국의 시대이다. 교회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오늘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오늘날의 교회, 즉 이 시대의 교회, 이 땅의 교회를 가지는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성경에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빛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의 표적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에서 빗나갔다. 주님이 그분의 목적을 이루고 그분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은 그분의 사랑하는 모든 추구자들에게 너무나 분명하다.

(위트니스 리, 교회의 역사와 지방 교회들, p.8-9)

만약 우리가 신약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우리는 교회의 중요성을 볼 것이다. 신약은 교회없이 그리스도께서 고립되시어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심을 계시한다. 신약은 특별히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임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이 시대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중요성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복음전파와 성도들을 함양하는 일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모두 교회를 위해 해야 한다. 복음전파는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을 함양하는 것은 단지 함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그분의 목적에 따르면 그러한 모든 일들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심지어는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도 교회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구원받지도 않았고 구원을 위해서도 구원받지 않았다.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구원받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다.

우리는 교회의 중요함에 인상을 받고 이것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라는 문제에 대해 더이상 무관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전파도 아니고 성도함양도 아니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 교회가 가장 먼저 라는 것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교회의 건축이 최우선이다.

(위트니스 리, 하늘에 속한 이상, 영문판 p.17-18)

지방 교회

두 번째로 우리는 반드시 교회가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이상이 아니다. 단순한 가르침이나 하늘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강하게 실제적인 문제이다. 우리는 반드시 실제적인 교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나 가르침이나 심지어는 이상 안에 교회를 가져서는 안되고 실행 안에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도하여 교회의 실제성을 볼 필요가 있다. 신약은 교회에 관한 많은 교리가 없지만 교회의 실행에 관한 온전한 그림을 보여 준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의 교리는 갖고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은 교회의 실행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예루살렘교회는 명백하고 실제였고 실질적이었다. 안디옥교회는 명백하고 실제였고 실질적이었다. 오늘날 매 도시에 있는 교회역시 명백하고 실제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보이지 않고 미래를 위한다고 할 수 없다.....

교회가 하늘에 있다는 신약의 성경구절을 찾을 수 있는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예루살렘에 교회가 있고(행8:1) 안디옥에 교회가 있고(행13:1) 겐그레아에 교회가 있고(롬16:1) 고린도에 교회가 있고(고전1:2) 다른 많은 도시안에 교회가 있다. 그들은 지방교회들이다. 결국 신약의 끝 계시록에는 일곱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의 그림이 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하다.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은 지방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한 도시에 한 교회라는 원칙을 본다. 하나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신약전체에서 이 원칙은 한번도 여겨진 적이 없다. 어떤 도시의 교회가 언급되었을 때 그것은 항상 단수였다. 교회가 복수로 언급되었을 때는 항상 도(province)같이 도시 보다 큰 지역이나 지구를 언급할 때였다. 성경에는 거리 교회들이나 학교 교회들이나 집의 교회들이나 국가 교회들이나 세계교회들이 없다. 오직 도시들에만 교회가 있을 뿐이다. 아마 당신은 가정 교회가 성경에 언급된 적이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이것은 단순히 그 도시의 교회전체가 집회를 가졌던 집을 나타내는 경우임을 볼 것이다. 교회의 경계는 집에 한정되거나 지역이나 국가로 확대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항상 그 도시의 크기였다. 온 도시를 감싸는 교회는 고유한 하나(unity)의 자격을 갖는다.

(위트니스 리, 교회의 이상, 영문판 p.3-10)

신약에서 교회가 하늘에 있다는 구절을 찾을 수 있는가? 그러한 구절은 없다. 신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안디옥에 있는 교회와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고전1:2) 에베소에 있는 교회와(계2:1) 다른 도시들에 있는 교회를 말한다(롬16:1). 이 모든 교회들은 지방교회라 불리운다. 신약의 끝에서 일곱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의 그림이 있다(계1:4, 11, 2:1, 8, 12, 18, 3:1, 7, 14). 신약에서 교회의 실질적인 표현이 지방이어야 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이것을 볼 필요가 있다.

(위트니스 리, 하늘에 속한 이상, 영문판 p.19)

이러한 한계가 있는 이유는 지방의 교회, 교회의 지방적인 표현이 교회의 통일과 유일한 하나를 지키기 때문이다. 로스 앤잴래스라는 도시의 교회가 있는 한 우리는 하나이다. 하지만 로스 앤잴래스의 교회대신 거리(street)의 교회들이나 길(avenue)의 교회들이 있다면 우리는 분열될 것이다. 그러면 거기엔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Wetmoreland Avenue:길 이름) 교회와 앨든 애비뉴(Elden Avenue:길 이름)교회가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집들의 교회가 있다면 또한 분열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한 형제의 집의 교회가 있고 또 다른 형제의 집의 다른 교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트니스리, 하늘에 속한 이상, 영문판 p.22)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성경 전체의 완성된 신성한 계시의 최종으로 모든 예언과 예표와 상징과 그림자의 성취의 총체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시작한 사도들의 가르침 전체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확대와 확장이다. 창조전에 하나님은 단지 신성만 갖고 계셨다. 하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셨다고 계시하셨다.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다. 그러한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요소와 인성의 요소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승천과 함께한 하나님의 확장이 그분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되고 영화롭게된 사람들과 함께 복합되고 연합된 것이다.

(위트니스 리, 사도들의 가르침, 영문판 p.137-138)

새 예루살렘은 상호거처이다. 영원안에서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하신 백성 안에 거하실 것이며, 또 그분 자신이 그들의 거처가 되실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한편으로는 성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막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주를 위해서는 장막이요 우리의 거주를 위해서는 성전인데, 우리는 그 안에서 살며 하나님을 섬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장막이 되고 우리에게는 성전이 될것이다.

(위트니스리,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과 함께 삶, p.147)

새 예루살렘은 분배와 연합과 표현의 문제이다. 먼저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이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되신다. 그다음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받고 거듭난 세 부분으로 된 사람들과 연합하여 그들을 온전케 하고 변화시키고 영화롭게 한다. 결국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영원한 표현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분배와 연합과 표현이라는 단어들이 매우 의미가 깊다. 이 성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분배의 궁극적인 완결이며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표현을 위한 신성한 연합이다.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실체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갖기를 바란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676-2677)

만약 새 예루살렘이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된 실제의 도시라면 이 말은 신성한 계시의 전체의 결론이 물질적인 도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역사 하셔서 먼저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땅으로 오셔서 사람을 구속하셨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이 땅에 사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분자신을 그 영으로 제자들위에 부워주셨다. 그후 제자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했다. 복음 전파의 결과로 수세기동안 사람들은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한 그분의 몸으로서 건축되기 위하여 교회에 더해졌다. 확실히 이 모든 것의 마지막 결과는 물질적인 도시가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성경의 마지막이며 가장 위대한 표징이고 우리 모두는 이 표징에 대해 합당한 해석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표징으로서 새 예루살렘은 창조와 성육신과 구속과 부활과 승천과 그분의 모든 변화시키고 건축하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선택받고 구속되고 거듭나고 변화 받은 사람들의 산 조성체를 얻어 그분의 거처가 되게 하시며 그분의 배필로서 그분을 영원토록 충만히 만족하게 하시고 표현하게 하신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688-2689)

새 예루살렘은 하와가 아담과 하나 되는 것처럼 구속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것이다.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취한 갈비뼈로 만들어졌고 그 후 하와는 아담에게 이끌려 와서 본성과 생명에서 그와 한 육체가 되었다(창2:21-24, 엡5:25-27, 29-32). 이 원칙은 새 예루살렘이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것과 동일하다. 새 예루살렘은 본성과 생명에서 구속자와 하나가 될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물질적인 도시가 본성과 생명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 물질적인 도시가 될 수 없음을 보았다. 새 예루살렘은 단지 신성한 요소가 더해진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이 그 안으로 역사해서 또한 본성과 생명 안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00-2701)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이다(계21:2, 10). 거룩한 도시라는 명칭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거룩하게 되고 분별된 도시임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써 새 예루살렘은 거룩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분별되었고 하나님의 거주지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철저히 적셔졌다. 이 위대한 도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분별되었고 그분으로 적셔졌다. 새 예루살렘은 위치적으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되고 분별되었으며 기질적으로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되고 적셔졌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거룩하다. 전체적으로 철저하게 거룩한 실체로서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적합하여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한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05)

거룩한 도시의 각 면의 세 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의 삼일 하나님의 세 분이 사람들을 그 도시로 이끌기 위해 함께 역사 하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로 나타난다. 이 비유들은 목자와 잃어버린 양과 여자와 잃어버린 동전과 아버지와 돌아온 탕자에 관한 것이다. 목자는 아들을 나타내고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를 나타내고 여자는 그 영을 나타낸다. 죄인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양을 데려오는 아들, 목자가 필요하다. 사람들의 마음에 빛비춰 그들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그 영이 필요하다. 돌아와 회개하는 탕자를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도시의 입구이시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26)

계시록 21장 21절은 거룩한 도시의 길이 정금이라고 한다. 그 길은 그 도시의 일부이고 그 도시의 각 부분은 금이다. 우리는 금이 아버지의 본성을 상징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후에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본성을 우리의 길로 걸어야 한다. 우리가 정금길을 걸을 때 그 길이 제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적으로 제한 받는다. 새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들은 우리안에 하나님의 금의 본성으로 유일한 길로 제한 받는다.

새 예루살렘의 보좌는 하나님의 행정이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계신 분이고 영원과거에 계획을 세우셨고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만유를 창조하셨다. 어린양은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완전한 구속을 수행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보좌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속 둘 다 이 보좌를 통해 수행되었다. 보좌는 생수의 강이 흐르는 근원이고 강은 생명나무가 자라는 곳이다(22:2).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를 위한 보좌는 하나님 자신을 흘려보내 이 생명의 흐름으로 그분의 목적은 완성된다.

(위트니스리, 신약의 결론, 영문판 p.2734-2735)

참고문헌

Witness Lee.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Msgs. 265-275).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2000.(신약의 결론으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Divine Dispensing for the Divine Econom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

Witness Lee. The Divine Dispensing of the Divine Trinit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3.(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하심으로 번역됨: 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Economy and Dispensing of God.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하나님의 경륜과 분배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Heavenly Visio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7.(하늘에 속한 이상으로 번역됨: 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the Local Churche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교회역사와 지방교회들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Life-Study of Numbers.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민수기 라이프 스터디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Living in and with the Divine Trinit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

Witness Lee. The Satanic Chaos in the Old Creation and the Divine Economy for the New Creatio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2.(옛 창조에서의 사탄적인 혼란과 새 창조를 위한 신성한 경륜으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Spirit.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그 영으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6.(세 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ruth Lessons (Level One, Volume 2).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6.(진리공과 1단계 2권으로 번역됨:한국복음서원)

Witness Lee. The Vision of the Church.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6.

Witness Lee. The Vision of the Divine Dispensing and Guidelines for the Practice of the New Wa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0.

Witness Lee. The World Situation and the Direction of the Lord’s Move Today.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82.